아빠의 식탁_시작이 반

난 어릴때 기억이 거의 나지 않지만,한 대여섯살쯤 엄마랑 쿠키랑 수제비 같은 음식을 같이 만들었던 건 기억이 난다.그 따뜻하고 몽실몽실한 기분은 세탁하고 햇볕에 잘 말린 파삭파삭한 이불요 위에 누워 봄햇살을 맞는 그런 느낌이랄까.평일 저녁엔 퇴근하실 아빠를 기다리면서 엄마랑 같이 쿠키틀로 과자 반죽을 찍기도 했고, 아빠도 그땐 바쁘지 않아서 주말엔 수제비 ...

요즘은 인도커리, 일본식 카레 등 카레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가끔은 어릴 때 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그냥 노란 카레가 먹고싶을 때가 있다. 대학생 때 연애하면서는 종종 가봤던 일본식 돈까스 집에서 접한 일식 카레, 한참 유행했던 인도 커리와 난은 대학가기전에 먹었던 집 카레와는 매우 다른 맛이었다. 일식 카레는 달큰한 맛이 편했고, 인도 커리는 그동안 먹었던...

“아빠. 햄계란 볶음밥 해줘. 주말에 해주기로 했잖아.” 칭얼거리는 소리에 잠이 슬쩍 깬다. 눈을 뜨고 나니, 둘째 얼굴이 한가득 들어온다. “아. 아빠 좀만 더 자고. 이리와. 우리 진우도 아빠랑 좀더 자자.” “아이. 싫어. 난 다 잤어.” “그래도 아빠랑 좀 더 자.” “히잉. 난 다 잤는데.” 그러면서도 이불 속으로 굴러들어온다. 동그란 뒤통수가 품...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창밖은 희뿌옇다. 의국에서 송별회를 해준다고 해 어제 간만에 술을 좀 했다. 속도 쓰리고, 목도 마르네. 오늘부터 출근 안 하는데, 알람을 안 죽였구나. 알람을 끄고 거실로 나간다.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낸다. 정수기가 있는데도, 장모님은 둘째가 좋아한다며 종종 보리차를 끓여놓고 가셨다. 보리차를 한 컵 마시고 나니 정신이 좀 ...

일요일도 회진을 돌았다. 항상. 펠로우때는 펠로우라 출근해서 전공의 오더 확인하고, 논문 쓰느라. 임용 후에는 또 내 앞에 입원한 환자들 보느라. 인턴 때 매일 회진 돈 걸 평생 자랑으로 생각하신 60대 외과 교수님이 그렇게 멋질 수 없었다. 그 기억 하나로 매일요일마다 난 병원으로 향했다. 항상 자는 아이들을 한번 보고 출근했는데, 사직서를 내고, 주변 ...

컨퍼런스가 끝나고, 병동 회진을 돌고, 외래로 내려가는 길. 펠로우 선생에게 물었다. “김선생님은 혹시 애 계란 취향 아세요?” “네? 무슨” “아. 라면을 끓여줬는데 내 딴에는 챙겨준다고 반숙 계란을 줬는데 자긴 반숙을 싫어하다네. 이런거 나만 모르나 해서.” 민구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던 펠로우는 안색이 밝아졌다. “어떻게 알겠어...

사직서를 내고 온 저녁. 메***트 구인공고를 훓어보다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한잔 두잔 마시면서, 동기 두엇에게 톡을 남겨본다. “아빠 왔어?” 큰 애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면서 물어본다. “응 아빠 왔어. 저녁은 뭐 먹었어? 할머니 오셨지?” “할머니 왔었는데 저녁은 안 먹었어.” “왜?” “배가 안 고파서 잔다고 했어.” “지금은? 지금도 안 고...

아내가 죽었다. 이미 반년이 지나 더 이상 슬프지는 않았다. 슬퍼하기에는 당장 매일매일의 일상이 더 컸다. 아내의 부재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꼬질꼬질한 아이들, 먼지가 쌓인 집안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올 때만큼은 현실로 다가왔다. 매일 아침이 전쟁같았고, 양가 어머니들 아니면 난 일을 하지도, 아이들을 간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느날 일요일 오후,...